[중고] Earth Crisis / Slither

1. Loss Of Humanity
2. Slither
3. Provoke
4. Nemesis
5. Agress
6. Biomachines
7. Killing Brain Cells
8. Arc Of Descent
9. Mechanism
10. Behind The Wire
11. Mass Arrest
12. Hairtrigger
13. Escape

지난 2년간 등장한 하드코어 밴드 가운데 가장 하드코어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Earth Crisis의 국내반으로, Victory Records 소속 아티스트들의 곡들을 담은 샘플러CD와 묶여서 발매되었다.

EARTH CRISIS / SLITHER

하드코어가 무엇이냐라는 논쟁은 이미 한물 간 이야기인 듯 하고 이제와서 또 그것을 새삼 탐구해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어쨌거나 80년대부터 나름대로 하드코어 컬춰에 몸이나 마음을 담고 있던 사람들로서는 작금의 흐느적거리는 믹스추어 계열의 밴드들이 간혹 '하드코어'라 불리는 현실에 당혹한 마음을 감출 길 없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태고로 Agnostic Front 시절부터 솔직히 하드코어 (좀더 정확히는 하드코어 펑크)의 본령이 그 고지식할 정도의 스트레이트함에 있어 왔고 하드코어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 듣는다면 10곡 중에서 9곡을 구분해 내지 못할 그 무시무시한 사운드의 정체성이 바로 하드코어 매니악들의 유니티를 지탱해 온 원동력이었을진대. 헌데,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미국 이스트코스트 대도시의 스트리트 씬을 다소간 지배해왔던 하드코어 펑크의 (수많은 동류 밴드들을 양산했다는 점에서) 최대 강점이자 (그로 인해 음악적 다양성을 상실해 버리고 거의 '멸망'해 버렸다는 점에서) 최악의 아킬레스건이었던 그 지독한 '오소독스' 집착성은 솔직히 나와 같은 골수 하드코어 매니악이었던 인물까지도 '이제는 좀 지겹다'는 느낌을 가지게 만들고 말았다.

90년대 중반 들어 이러한 하드코어의 딜레마를 벗어나게 해 준 조류가 바로 같은 거리에서 흑인들에 의해 향유되던 힙합 컬춰였고 그러한 힙합적 요소중에서 특히 랩의 라이밍을 취사선택하여 하드코어의 공격성에 믹스다운해 낸 것이 소위 '랩 메틀' 혹은 '랩 코어' 성향의 조류였다. 그 선구자적 인물은 물론 왕년의 Beastie Boys였지만 이 친구들이야 이미 하드코어 바닥을 떠나간 지 오래였고, 그 직접적인 원동력으로 볼 수 있는 밴드라면 멀리는 Anthrax를, 다소 시기가 지난 후에는 Biohazard를 들 수 있겠다. 특히 이 분야에서 Biohazard의 영향력은 막강한데, 역시 하드코어에 한때나마 목숨 걸었던 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뭐, Biohazard도 나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원년 멤버를 꼽는다면야...'라며 떠오를 밴드의 이름, 바로 Earth Crisis이다.

거의 '고군분투하며' 90년대 뉴욕 하드코어 씬을 뒷받침해 온 '대표 레이블' Victory를 통해 92년 데뷔한 Earth Crisis는 초창기 비교적 정통 하드코어에 가까운 사운드로 시작했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랩의 공격적 라이밍과 가사 작법을 차용하기 시작하고 이후 2000년 본작 "Slither"에 이르기까지 총 6장의 앨범을 Victory 레이블을 통해 발표하고 (단 98년의 "Breed The Killers"만은 Roadrunner를 통해 발표했다 - 멤버들은 그다지 이 시기를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듯 하다) MxPx, Madball, V.O.D., Stuck Mojo등과 함께 뉴욕 하드코어가 아직은 살아 남아 있음을 몸소 보여준 친구들이다. 그들이 철저한 채식주의자들이며 거의 스트레이트 엣지에 가까운 금욕적인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드코어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라면 그다지 새롭게 들리지 않을 내용이지만 하드코어가 아직 새로운 시도로 느껴지는 사람에게라면 매우 신선하게 들릴 이야기다. 일찍이 워싱턴 D.C.의 Minor Threat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저 'no alcohol, no smoking, no meat'의 라이프 스타일과 철저히 '옳고 그름을 따지고 드는' 똘똘한 젊은이 풍의 가사는 확실히 뭔가 엽기적이라거나 퇴행적인 면모의 Slipknot류의 최근 밴드들과는 달리 별반 쿨하지도, 모방심리를 자극하지도 않지만 이제 와서는 도리어 신선하게 느껴진다.

사운드상의 이야기를 하자면 이야기가 다소 길어질 수 있는데, 일단 그 비교의 대상을 찾자면 급한대로 위에서 이야기한 Biohazard나 Stuck Mojo를 들 수 있겠다. 하지만 Biohazrd가 최근 멜로디컬한 면과 힙합적인 면에 심히 치중하는 경향이 있으며 Stuck Mojo는 여전히 헤비메틀적 요소로 강하게 어필한다고 한다면 Earth Crisis는 초창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스피드보다는 헤비함을 강조하며 멜로디를 내세운다고는 해도 그것은 오히려 상당히 Black Sabbath적인 처절한 우울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그들이 랩의 요소를 전면적으로 부각시킨다고는 해도 그것은 그다지 '랩 메틀'이나 '랩 코어'로 들리기보다는 오히려 한창 때의 얼터너티브적인 요소가 감지될 정도이다 (오히려 그들이 그렇게도 경멸하는 Korn적인 면모나 전혀 다른 세상의 밴드인 Filter 같은 냄새를 풍기는 부분도 있다). 따라서 듣는 이에 따라서는 단순히 치고 달리는 순도 100%의 하드코어를 기대했던 사람에게라면 약간의 실망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90년대의 하이브리드/믹스추어적인 경향에 깊이 물든 사람이나 Black Sabbath에서 Danzig, Tool에 이르는 어두움의 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쌍수들고 환영할 앨범이 바로 이것이다 (게다가 이 친구들, 의외로 이렇게 마이너 코드 일색의 음악과 그로울링 랩을 구사하면서도 은근슬쩍 뭔가 노스탤지아를 느끼게 하는 멜로디라든지 Rage Against The Machine을 연상케하는 다소 파퓰러한 브릿지를 조금씩 섞는 재치까지 선보이고 있다, 하하). 그리고 만약 이 앨범이 마음에 들었다면 자연히 그들의 구보, 그리고 Victory 레이블의 다른 밴드들 음악까지 찾아 듣게 되지 않을까 싶다.

글 / 노낙경 (Dream On)